Rybs 2019. 5. 2. 10:59

나는 꿈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았지. 

꿈다운 꿈이었어.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게도 모든것이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페허가 되어간다는 점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부상자들도 없었고, 찰나의 순간이나마 먼저 죽은 소중한 사람들을 찾는 울음도 없었고, 영문도 모르고 우는 아이들도, 담담하게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공포에 미쳐버린 이들도 없는 아주 차분한 종말이었다. 아무도 고통받지 않고, 아무도 공포에 질리지 않고, 아무도 끝나는 그 생에 후회나 미련을 가지지 않던 그런 끝을 보았어. 악몽이었을까? 나는 모든게 사라지는 순간에 해변가에 누워 있었거든, 뉴튼. 내 지팡이는 파도에 먹혀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지 오래여서 나는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네.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겠더라고. 꿈속의 나는 그 종말을 가져온 사람이었고 모든게 완벽했거든. 너와는 달라, 뉴튼 가이즐러. 내가 이 세계의 끝을 원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거야. 




바닷바람에 짠내가 유난히 진하게 실려올때 허먼 고틀립은 답지않게 감상적이 되곤 했다. 습하고 찬 공기에 제 담배 연기를 더하며 아침 메뉴를 무심코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품는 일. 이 새벽에 시내 외곽에서 피어올려지는 연기는 으레 카이주를 해체하고 남은 폐기물들을 태우는 연기였다. 그 괴물의 뼈며 배설물까지 온몸을 뜯어 쓰는 업자들이라 할지라도 심하게 상한 부위나 썩은 것들은 소각장에서 태운다.예측 프로그램의 오차를 줄이려 밤을 꼴딱 새우고 퀭한 눈 밑을 문지르며 담배 한 대나 피우려고 나오는 새벽에는 공기에 썩고 상한 것들이 타들어가는 역한 냄새가 섞여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왔고. 

잠은 좀 잤어?
저리 가. 
안 잤구나. 

그 냄새와 비슷하게, 짜고 역한 비린내가 옅게 밴 남자가 제 새벽의 틈에 끼어들기도 하였다. 둘 다 허먼에게는 썩 달갑잖은 일이었다. 




너는 네가 어떻게 될지 무섭지도 않아?

허먼은 말했다. 뉴튼 앞에 앉아 그렇게 물었다. 뉴튼 가이즐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말의 의지라도 남았다는 듯이. 허먼 고틀립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던지는 것에 지친 지 오래였지만 희망을 도저히 버릴수가 없었다. 답이 없는 상대방에게 기대를 거는 일은 감정의 낭비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너는 겁이 많잖아. 아마 뉴튼이었다면 이 말을 부정했을 것이다. 또는 적어도 너보단 낫다고. 그렇게 허먼을 쪼아대며 얼버무렸을 것이다. 뉴튼이었다면. 뉴튼이었다면이 무슨 소용이 있지? 허먼은 두려웠다. 희망에 먹이가 없는 나날들이 너무나 두려웠다. 얕게 드는 잠마다 뉴튼이 죽는 꿈을 꿨다. 네 몫만큼 내가 두려운가 봐. 밖은 새벽이었다. 가까운 곳엔 바다가 없었다. 뉴튼에게선 희미한 소독약 냄새 외에 그 어떤 역한 물비린내며 부패하던 살점의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허먼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뉴튼을 은근히 깔보고, 그가 저지른 일을 깎아내리는 나름의 거짓말이었다. 나는 꿈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았지. 그러나 허먼이 꿈에서 본 것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유약한 그의 공포가 빚은 뉴튼의 죽음이었기에, 결국 내심 뉴튼 가이즐러가 그를 이겼다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