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bs 2019. 8. 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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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아래의 그 하얀 집에는 우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나갈 때마다 우리는 젖은 모래로 가득 찬 해변을 한참이고, 정말 한참이고 걸어야 했었습니다. "제길," 그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꼭 한마디를 덧붙이고 나와 나란히 걸어갔고 나는 늘 일정 시간동안 망설이다 메마르고 얇은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내리곤 했어요.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잠금쇠 걸듯 손깍지를 끼었습니다. 소금기에 절은 머리칼이 버석하게 흩어지고 피부는 끈적였던 곳. 그와 내가 함께 살았던 곳. 위태로운 피난처. 그 위태롭던 망각이 주던 기쁨들이 너무 찬란해 잠시마나 나는 목 뒤를 서늘하게 만들던 죽음을 잊고 혀 끝에 닿아 단맛을 내던 삶을 생각했던 걸 기억해요. 서로의 대체품들, 누구 하나 더 다가갈 때마다 진짜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자각하게 되곤 하던 시간들. 그렇지만 의미가 없었을까, 그 하얀 집은?


크레닉은 일단 손목에서 비닐로 된 팔찌를 뜯어내려고 했다. 그 질긴 팔찌는 제대로 뜯기지 않아 손만 아팠다. 제가 가위를 가져올게요. 기다려봐요. 크레닉은 멀거니 제 앞의 남자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날 잡으러 오지 않을까. 크레닉은 팔찌를 다시 꽉 쥐고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팔찌는 질겼다. 당신을 숨길 곳을 찾았는걸요. 곧 카일의 손 안에 있는 가위가 팔찌를 깔끔하게 잘랐다. 크레닉은 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왜 날 데리고 나왔어? 카일은 웃어보려고 했다. 잘 되지는 않아 대답을 미루고 입꼬리를 문지른 뒤에나 그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당신이 거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요. 오롯히 당신을 위해서란 뜻 은밀하게 드러내보이며 카일은 그의 손을 모아 꼭 잡았다. 그게 진실인지는 말하는 그도 알 수 없었다. 크레닉은 손을 빼고 일어섰다. 이건 중범죄야. 환자를 빼돌리는 거. 걸리면 해고나 면허 박탈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간다고. 그는 이럴때만은 침착하고 말에 논리가 있었다. 미친 사람 치고는 그랬다. 카일은 가만히 따라 일어섰다. 날 따라나선 걸 보니 거기가 싫었던 건 맞나봐요. 거실 한 켠은 모두 유리창이었다. 크레닉은 다가가 커튼을 걷고 밖을 보았다. 카일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두었다. 맘에 들어요? 크레닉은 하염없이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모래사장과 바다는 아름다웠다.

아니.
그럴 것 같았어요.

카일은 뒤에서 크레닉을 감싸안았다. 우리의 새로운 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