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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is/Geralt)Fireside

Rybs 2023. 1. 22. 17:31

감(@c16421204)님의 커미션으로 글 작업하였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곳을 칭송하는 말에 따르자면 격렬한 전쟁 중에도 옥센푸르트의 문만은 늘 열려있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그 대학의 이름을 칭송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글쎄, 그 시대에 살아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시대까지 살아남지 못했고 한때 교정을 가득 채우던 부유하고 충만한 학생들은 여러 전장 속으로 흩어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였으며...모든 것이 끝난 뒤에 나는 생각보다 자주 이 모든 말들은 그저 옛 일을 최대한 무디게 지나 보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고는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이 꺾인 가지들을 보며 적어도 안쪽은 차마 마르지 못하고 푸르렀노라, 하고 탄식하는 일과 같게도. 그러나 꺾인 가지는 아무리 반듯히 받쳐둔대도 울퉁불퉁하게 붙어 자라거나 그대로 말라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 그것의 운명일 뿐, 죽은 것은 돌아오지 않고 망가진 것은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이러나저러나 그 전쟁 중에도 닫힌 바 없다는 긍지 높은 대학의 문조차도 마하캄에서 제련한 무쇠 나사와 강철 띠로 꽉 조인 나무판자들에 단단히 잠겨 감히 누굴 들이거나 누굴 내보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는 게 당시 상황의 요약이었다. 보초를 서는 군인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창고에 마구잡이로 옮겨져 돌이킬 길 없이 습기가 슬기 시작한 책들을 보며 눈물을 삼키던 이들 역시도 무력하게 돌려보내진 것이 봉쇄 이후 단 한 주 동안 생긴 일로, 그리하여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지식의 건물 안 남은 자들은 몇 없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막하고 온기 없이 텅 빈 지식의 장 내에 꿋꿋하게 남은 자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리라 짐작하게 되겠지만…나는 몰라도 갑작스레 찾아온 내 오랜 친구는 아니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후하지 못한 평이래도 이해하시라, 그는 어느 면으로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므로. 

 

단델라이온, <시의 나머지 반세기>


게롤트는 책들의 내용보다는 글자들이 적힌 종이가 유용한 장작이 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적어도 일말의 교양이-아무도 그가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그로 하여금 아무 책이나 집어 불 속에 던져넣는 것을 막고는 있었으므로 그의 행동은 평소처럼 신중한 감이 있었다. 대학 건물 중에서도 가장 외지고 강과 가까워 습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더군다나 막 두 번째 서리가 땅을 지나간 계절이라면 단단한 돌벽으로 둘러진 내부가 어떤 감상적인 지식보다는 꾸준히 타오르는 불의 온기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위쳐에겐 목욕 뒤의 젖은 몸을 말리는 것이 수많은 사본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들보다는 중요하기도 했고. 조심스레 <코비어의 역사>와 <시와 발라드>를 집어들고 낱장을 북북 찢는 손이 냉기에 덜덜 떨렸다. 목욕이라니, 사치롭군. 여기에 불법적으로 침입한 상태인 것을 고려하자면 어떤 침입자가 목욕까지 즐기며 머물겠나-설사 이 목욕이라는 게 실상 뼈를 쑤시는 강물에 몇 분 간 뛰어들어 얼어 죽기 전에 더러운 때를 벗겨내는 정도에 불과하더라도-병사들이 지키는 것은 머나먼 정문이기도 했고, 봉쇄가 지속될수록 순찰을 도는 일은 줄어들다 못해 더 이상 이뤄지지 않음을 애초 몰래 들어올 때에 미리 귀띔받은 참이었기에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눅눅하게 몸과 머리가 마르고 추위가 사그라들 때쯤엔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손이 닿는 곳에 무기들을 두는 것이 버릇이었으니 지금도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지식을 양식 삼아 밝게 일어나는 빛과 온기에 젖은 머리와 몸이 마르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게롤트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책을 하나 더 뽑아와 던져야겠군. 한번 불탄 것들은 되돌릴 수가 없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럴까?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책이나 그런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그는 덜 타들어가 아직 제목을 읽을 수 있는 가죽 표지를 잿더미 속에 보이지 않게 묻으며 단델라이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말 많은 친구가 병사들과의 수다를 마친 뒤 무언가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들고 돌아오거든 그것들을 먹으며 다시 일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고 불타 사라질 대목을 적는 일 말이지. 종이 타는 냄새는 다른 것들에 비하자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열기에 붉게 익은 뺨이 홧홧하고 간간히 남은 조각들이 강하게 타오르거든 빛에 놀란 두 눈이 시렸다. 맨눈으로 타들어가는 책장들을 마주하지 말고 고개를 돌리면 될 일이었으나...

 


젠장, 단델라이온. 나는 위쳐지 시인이 아냐. 그런 식으로 그를 묘사해내는 방법 같은 건 몰라.


단델라이온은 점토로 조악하게 빚은 잔에 포도주를 좀 더 따라내며 기어이 성을 내는 상대를 째려보았다. 덜 마른 흙의 향이 포도주에 잔뜩 끼어있기는 했지만 애초 그런 것을 신경 써 마실 정도의 좋은 포도주도 아니었기에 텁텁한 맛이 성질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그의 성질을 긁는 것은... 그보단 우리의 성질을 긁는 것이겠지. 우리가 그 과거를 회상할 때에는 단순한 그리움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보다 열 배는 더 좋은 포도주가 있었던 때 말이다. 늙고 지친 위쳐란 늙고 지친 시인만큼이나 좀 더 너그럽게 구슬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단델라이온은 제가 입을 댔던 잔을 게롤트가 앉은 쪽으로 밀었다. 위쳐는 아까부터 싸구려 포도주로 몸을 데우는 대신 검은 빵을 잘게 뜯어 오래도록 씹고 있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잘 되지 않을 거라고. 게롤트는 죽처럼 변한 내용물이 목구멍을 지나가는 감촉이 맘에 들지 않음에도 계속 그렇게. 잘게 뜯어 오래도록 씹고, 삼키고, 굳은 빵보다도 삼켜지지 않는 기억들을 한낱 불에 타들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종이 위에 옮겨두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단델라이온은 깃펜에 잉크를 찍어 종이 위에 올렸다. 그야 언제나 글을 쓰는 것보다는 노래하는 것을 더 좋아했으나 어떤 것은 그렇게 적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알아. 계속할까? 게롤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새까만 어둠을 한참 응시한 뒤였다. 레지스는, 그는 그러니까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적어도 그런 것 같았지. 가끔은 답지않게 순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만큼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의적이란 사실에 내가 지나치게 안도했을지도 모르겠고. 일반적으로 보던 피 빠는 괴물들하고는 분명히 달랐으니까. 전설 속의 괴물들은 정의로워서는 안되고 위대한 영웅들은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데 그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고 나는 영웅인 적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면에서 잘 맞는 짝이었을지도 몰라. 내가 살며 익힌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 그와 맞선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무서웠고 어느 순간 그 두려움이 너무도...그걸 편안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죽지 않겠구나.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의 시간을 살아왔고 우리가 모두 죽은 뒤에도 살아갈 거라고 믿을 때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할 수가 없었다고밖엔 할 수가 없는 거야. 그가 곁에 없을 때나 있을 때나. 불길이 어둠에 먹혀 사그라들고 있었다. 너른 공간 전체를 데우기에 난로가 너무나 작았기에 그들은 성기게 짜인 태피스트리를 벽에서 끌어내 둘둘 감고는 난로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결국은 그도 죽었지. 그 순간 나는 정말로 두려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롤트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슬픔이며 고통이 묻어나지는 않았으나 꺼져드는 불길만큼이나 낮고 조용했다. 다시는 편안해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아무래도 이것은 적지 않는 게 좋겠는데.

 

하지만 늘 그렇듯 단델라이온은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런 것까지 적어야 할 필요가 있어? 하고 게롤트는 한번쯤은 물었을지 몰라도.

 


두 번까지는 묻지 않았다. 단델라이온이 한때 그의 노란 눈을 호박과 달에 비유했던 것처럼 뱀파이어의 눈을 마노와 토탄에 빗대어 쓰는 것을 더 말리지도 않았다. 이 건물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면 창이 높고 작아 강의 바람이 덜 들이친다는 것뿐이었고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막 닭 울음소리가 한번 들린 참이었기에 게롤트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얼마간 움직여본 뒤 내내 몸을 붙이고 있던 돌바닥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몸뚱이가 돌과 한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차라리 돌이었거든 아프지라도 않았을 것을 그렇지는 못했다. 작고 높은 창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외풍에 어디선가 진하게 우린 들쑥과 정향, 로즈마리와 세이지와 버드나무의 껍질, 마늘과 생강, 박하와 희미한 히스 꿀, 이 모든 게 뒤섞인 향이 뒤엉켜 그의 코끝을 찔렀다. 애초 유쾌한 향들이 아닌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러한 향들이 불러오는 기억들에 게롤트는 이골이 났다. 흔하디 흔한 조합의 향이 무지막지하게 코를 찔러오는 때마다 일일이 레지스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에, 그러나 매번 그렇게 떠오르는 것이 너무도 익숙하단 사실에, 잘리고 부러진 몸뚱이가 억지로 붙을 때마다 맡던 향이 가져오는 이전의 고통들에 그저 너무나 지쳐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잠시 자리를 비웠던 단델라이온이 들고 돌아온 찻잔 속의 혼합물이 아직 남은 약학 교수의 마지막 비축물들로 이루어진 배려라며 떠드는 것을 들으며 게롤트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잔에 입을 댔다. 쓴 맛 뒤에 단 맛, 단 맛 뒤에 쓰고 매운맛이 나는 게 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간밤에 늘어놨던 이야기들-대부분의 것들을 내가 그렇게나 말해버렸다는 사실까지 잊게 만들어주는 작용은 없겠지? 그런 농담 아닌 말을 던지고픈 욕구는 쉽게 억눌렸기 때문에 그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아, 그런 것 치고는 나에 대해 적은 부분이 아주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레지스는 책장 사이에 가름끈을 끼워 덮은 뒤 게롤트에게 내밀었다. 물론 당신 이야기를 옮겨준 단델라이온이 결국 당대를 풍미한 훌륭한 문장가로 추앙받을만큼 훌륭했던 것도 있겠지만 그에게 이야기를 꽤 자세히 해준 모양입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적절한 때에 많은 것들을 생략한 채 출간된 것은 또 한참 전의 이야기가 되어 더이상 옥센푸르트 대학의 문은 잠겨있지 않고, 나라들이 멸망했다 다시 세워지고, 군인들은 각자의 집 또는 왕궁, 돈 많은 주교의 저택 뒷문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허무하게 죽는 시대의 일이었다. 게롤트는 책을 받아들고는 아주 잠시 고민하다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낱낱이 찢는 것보다 통째로 던져 넣거든 더 오래 탈거라는 계산 하의 행동이기도 했으나 레지스가 내내 기묘하게 히죽거리고 있는 것이 꽤 견디기 힘들기도 했던 참이었다. 단델라이온이 알았음 마음 상해했겠는데요. 거기다 나도 나에 대해 기술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요. 레지스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꽤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아니면 직접 말해줘도 되고요. 당신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안이야 해볼 수 있는 법이죠. 세상은 변하다가 끝났고 다시 시작한 데다 내가 기억하기론 당신의 늑대 메달은 드루이드 숲의 나무들과 함께 불타 흙 속에 녹아들었을 테니까요. 새 시대에는 새로운 일들이 생기는 법이랍니다. 경험상 그래요. 느리게 타오르는 종이뭉치들을 바라보던 게롤트는 고개를 돌려 레지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뱀파이어 친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말하는 중에도 날카로운 이가 거진 다 드러날 정도로 기쁘게 웃고 있었는데 설사 그게 저를 얼마간 놀리듯 보임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그가 두려웠고,

 


그렇기에 편안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있던 것이다. 이미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글로 다 써졌던 것이다. <코르보의 비소고타>

 


추천곡 : https://youtube.com/watch?v=8-LewaeKejM&si=EnSIkaIECMiOm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