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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 절벽 아래의 그 하얀 집에는 우리가 있었어요. 거기서 나갈 때마다 우리는 젖은 모래로 가득 찬 해변을 한참이고, 정말 한참이고 걸어야 했었습니다. "제길," 그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꼭 한마디를 덧붙이고 나와 나란히 걸어갔고 나는 늘 일정 시간동안 망설이다 메마르고 얇은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내리곤 했어요.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잠금쇠 걸듯 손깍지를 끼었습니다. 소금기에 절은 머리칼이 버석하게 흩어지고 피부는 끈적였던 곳. 그와 내가 함께 살았던 곳. 위태로운 피난처. 그 위태롭던 망각이 주던 기쁨들이 너무 찬란해 잠시마나 나는 목 뒤를 서늘하게 만들던 죽음을 잊고 혀 끝에 닿아 단맛을 내던 삶을 생각했던 걸 기억해요. 서로의 대체품들, 누구 하나 더 다가갈 때마다 진짜로 .. 2019. 8. 3.
Deep blue 나는 꿈에서 세상의 종말을 보았지. 꿈다운 꿈이었어.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게도 모든것이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페허가 되어간다는 점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부상자들도 없었고, 찰나의 순간이나마 먼저 죽은 소중한 사람들을 찾는 울음도 없었고, 영문도 모르고 우는 아이들도, 담담하게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공포에 미쳐버린 이들도 없는 아주 차분한 종말이었다. 아무도 고통받지 않고, 아무도 공포에 질리지 않고, 아무도 끝나는 그 생에 후회나 미련을 가지지 않던 그런 끝을 보았어. 악몽이었을까? 나는 모든게 사라지는 순간에 해변가에 누워 있었거든, 뉴튼. 내 지팡이는 파도에 먹혀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지 오래여서 나는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네.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겠더라고. 꿈속의 나는 그 종말을 가져온 사.. 2019. 5. 2.